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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술사

by 츄츄♥ 2022.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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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술사

1) 구석기 시대
한국의 미술은 한반도 및 주변 지역에서 발생했던 미술을 말하며,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정착 생활을 하지 않고 유랑생활을 했다. 연천 전곡리 유적에서는 아슐리안 석기 형태를 갖춘 주먹도끼와 박편도끼가 발견되기도 했다.

2) 신석기 시대
한반도에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5만년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석기 시대의 공예품 중 대표적인 것은 토기이다. 신석기 시대 초기부터 경작이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토기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식량을 저장하기 시작했고, 미적으로 물건을 꾸미려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토기는 야외에 구덩이를 파고 700도 정도의 온도로 가열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신석기시대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토기는 덧무늬 토기이다. 토기의 아가리 둘레에 진흙을 덧붙여 문양을 만들어 덧무늬토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덧무늬는 흙 띠를 지그재그식으로 배열한 것과 돋은 평행선 바깥쪽에 팥알처럼 돋은 점열을 한 줄씩 배치한 것 등이 있다.

이어 빗살무늬토기 또는 즐문토기가 등장하였다. 빗살무늬는 나무나 뼈연장 등으로 된 무늬새기개를 가지고 그릇 바깥면에 짤막한 줄을 배게 누르거나 그어서 새겼다. 이러한 빗살무늬는 질그릇에 따라 여러 모습을 나타내는데, 한국의 빗살무늬토기는 점선으로 된 짧은 줄을 한쪽으로 또는 서로 방향을 엇바꾸어가면서 그려서 그 모습이 생선 뼈처럼 생긴 것이 특징이다.

기원전 2천년경이 되면 문양이 사라지고 실용성이 강조된 민무늬토기(무문토기)가 등장한다. 이 시기가 되면 생산력이 늘어나면서 토기가 커지고, 장식적인 목적보다, 실용적인 목적이 더 강조되기 시작한다.

3) 고조선 시대
역사적으로 고조선 시대는 청동기와 철기를 아우른다.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300년경까지 한반도에서 청동기가 사용되기 시작한다. 구리는 구하기 힘든 물품이었으므로 청동기 물품은 주로 동검, 동경 (거울), 방울 등의 제의용구가 많이 발견된다. 또한 이시기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집단 취락을 만들어 거주하기 시작했음이 관련 유적을 통해 확인된다. 또한 이 시기 사람들은 고인돌을 만들고 그 안에 청동기 등의 용품들을 매장하였다. 청동기 제의용구, 집단취락, 고인돌 같은 사례로 비추어 청동기 시대에는 점차 계급이 발생하고 제사장 중심의 국가체제가 성립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조선의 문화권이었던 곳에서는 비파형 동검이 출토된다. 이를 통해 고조선의 문화권 영역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외에도 곡옥, 돌칼, 붉은간 토기 등이 발견된다. 제의용구만을 보면 고조선은 시베리아 지역의 샤머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기원전 300년경에 고조선에서는 철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4) 원삼국 시대
원삼국 시대는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기원전 300년경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지배적인 국가로 성장하게 되는 기원후 300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 한반도에는 부여, 옥저, 동예, 삼한 등의 부족국가들이 산재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삼국 시대
부족국가 수준이었던 원삼국시대가 지나고 기원전 1세기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가야는 연맹 국가를 유지하며 562년까지 존속하다 신라에 흡수된다.

① 고구려 시대
고구려 문화를 잘 알려주는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고구려 고분군이 있다. 2004년 북한은 평양 인근에 있는 후기 고구려 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 신청했다. 같은 해 중화인민공화국은 고대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무덤군이라는 이름으로 지린성 지안시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전기 고구려 고분과 오녀산성, 환도산성, 국내성 등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했다. 고구려 고분에 남아있는 고분벽화는 한반도 지역에서 나타나는 회화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예이다. 이 고분벽화에는 당시 계급 모습, 의복, 건축양식, 부엌 모습, 수레, 수렵, 군사 등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이외에도 고구려는 일본 호류지의 벽화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② 백제 시대
백제는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성립된 국가였다. 백제의 미술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며, 대외적으로는 중국 양 (남조) 및 일본과 교류했다. 백제 금동대향로, 미륵사 석탑, 익산 왕궁면 왕궁리 오 층 석탑 사리장엄구, 무령왕릉 출토 유물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이외에 전라도 영산강 지역의 문화는 백제 지배층이 자리 잡았던 경기도나 충청도의 문화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나주 신촌리 금동관을 보면 이 지역 호족들은 백제 지배층과 별도의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거나, 백제 지배층으로부터 봉건적인 지위를 인정받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외적으로는 일본과 교류가 활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인 박사의 이야기나 칠지도의 사례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최근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무덤(전방후원분)이 백제 영역 내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③ 신라 시대
초기 신라는 한반도 동남쪽에 자리 잡아 불교 등 외국 문물을 수용하는 속도가 가장 느렸으나, 이후 당의 힘을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초기 신라는 가야와 함께 각종 모양의 도기를 생산하였으며, 특히 국보 91호 도기 기마 인물형 명기가 잘 알려져 있다. 이 그릇의 말탄 인물 모습은 당시의 생활상을 추측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외에도 도기에 토우를 장식한 토우 장식 장경호 또한 당시 신라인들의 사고와 생활상을 짐작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신라인들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성행위를 하는 모습뿐 아니라, 코끼리나 개미핥기 같은 동물의 모습도 토우로 만들어 붙였다.

신라 경주는 수백 년간 신라의 수도였으며, 실크로드를 따라 형성된 국제 교역망의 종착지였다. 경주 왕릉들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면 서역의 영향을 받은 문양이 보이며, 특히 경주 98호분 남분 출토 유리병은 로마 유리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지중해에서 신라까지 물품 교역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코끼리 같은 동물들의 모습을 토우로 표현한 것도 이런 국제적인 교역망 덕분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외에 경주에 있는 왕릉에서는 금관과 금제 장신구들이 출토되었는데, 이를 근거로 흉노족과 신라인 사이에 연관성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금제 허리띠에 붙어있는 장신구들이 유목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신라 왕릉에서는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 등이 발견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현재 유일하게 현존하는 신라시대 회화이다.

④ 가야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달리 중앙집권 국가로 나아가지 못하고 연맹국가 단계에서 신라에 흡수되었다. 가야의 미술품으로는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대량의 도기들이 유명하다. 이외에도 고구려와 비슷하게 가야 사람들은 다양한 마구와 판갑을 만들어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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